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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칼럼 - 돌봄, 탐욕과 무관심의 대지에 내리는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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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목 돌봄, 탐욕과 무관심의 대지에 내리는 단비

돌봄, 탐욕과 무관심의 대지에 내리는 단비

▲성현 목사 (필름포럼 대표)

 

   몇 해 전 이사할 집을 구할 때의 일이다. 소개받은 한 집에 들어갔는데,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니 작은 꽃밭이 있었다. 평소 밖에서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집에서도 흙을 만지고 꽃을 기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밭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 집을 선택해 이사했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이사한 첫날,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갔다.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그런데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소리치며 거실로 뛰어 들어왔다.“아빠, 벌이랑 벌레가 있어요.” 흙과 꽃은 좋아도 벌과 벌레는 싫었던 것이다. 이리저리 구슬려도 아이들은 그날 이후 나갈 생각을 안 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아빠가 함께 나가면 좋았으련만 바쁨을 핑계로 그러질 못했다. 손길이 닿지 않는 꽃밭에 잡초가 자라기 시작했다. 그곳을 돌보지 못한 부채의식을 가진 아빠 외에는 가족 중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는, 죽은 공간이 돼버렸다. 기계는 관리하면 고장나지 않을 따름이지만 생명은 돌볼수록 풍성해진다. 생명이란 관계를 통해 그 안에 담긴 씨앗과 같은 가능성이 발아하기 때문이다. 병이 들고 탈이 났다면 그만큼 돌봄이 부족한 탓이다. 사람의 몸만 그럴까. 사람과의 만남도 그렇고, 사람과 생태계와의 만남 역시 그러하다. 지구가 병들고 사회가 아프다면 그만큼 우리의 무심함이 컸다는 방증일 것이다.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 학술단체인 ‘더 케어 콜렉티브(The Care Collective)’는 책 ‘돌봄선언’에서 현시대를 돌봄의 부재, 무관심이 지배하는 곳이라 진단했다. 초개인화되고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내세우며 경쟁적 주체처럼 느끼고 행동하도록 부추김을 당했다는 거다. 그 결과 우리 일상은 서로 간에 방치되고 소외되며 여러 재난에 시달리게 됐다. 더는 미루지 말고 돌봄을 삶의 중심에 놓아야 하며 돌봄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전장에서 군의관이 부상당한 적군에까지 돌봄의 의무를 확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화도 돌봄이 시급하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더 좋은 세상을 꿈꾸게 하며 창조의 은총을 발견하게 하는 문화를 만나기 어려운 시대다. 명성과 부가 예술을 선도한 탓이다. 그 속에서 창작자들은 병들어가고, 대중도 예술에서 아름다움과 진리를 찾으리라는 기대를 접는다.기독교 문화도 메말라가기는 마찬가지다. 감시자와 평가자는 많으나 창조자와 정원사는 드물다. 동어반복의 안전지대만 늘어간다. 풍성한 생명의 언어로 복음을 해석하고 전하려는 작품 대신 원색의 날 선 언어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콘텐츠가 더 호응을 얻는다.자신을 옳게 보이고 싶어 하며 영생의 방법을 묻는 한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리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고 말씀하신다. 무얼 하라는 것이었을까. ‘돌봄’이다.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이를 직접 ‘돌보아’ 주고(눅 10:34), 주막 주인에게도 비용을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한다.(눅 10:35) 하늘을 올려다보아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은 영생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돌봄의 일상적 행위로 응답하셨다.

  탐욕과 무관심으로 갈라진 대지에 필요한 것은 돌봄이라는 단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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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봄, 탐욕과 무관심의 대지에 내리는 단비 2021.06.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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